이 묘지는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생몰년 및 행적, 가계 관련 내용을 담은 총 248자의 글자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이 묘지는 1998년에 반출되었고, 2014년 국외 소재문화재재단의 노력으로 소재가 확인되었다.
2017년 도도로키 구니에等々力邦枝 여사는 한국 미술을 사랑했고 한일 양국의 우호 증진을 희망한 소장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 묘지를 기증했다.
이선제(1390-1453)는 집현전에서 학술관료로 재임하며 고려사와 태종실록 및 신농본초 편찬에 참여했고, 강원도관찰사와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는 광산현에서 광주목으로 이름을 되찾은 후 기쁨의 뜻을 기념하여 당시 완성된 누각의 이름을 희경루喜慶樓로 지었다.
이선제는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생몰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5대손 이발李潑(1544-1589)이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그와 일가족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 이선제의 관직도 삭탈당하고 저술도 소실되어 그와 관련 기록을 주로 실록에서 찾을 수 있었으나, 이 묘지가 발견되어 이선제 생몰년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묘지는 이선제의 삶과 후손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광주광역시에는 필문이선제의 부조묘不祧廟(광주광역시민속자료 제7호)가 남아 있고, 그의 뜻을 기리는 필문로가 있어 그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