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wangju National Museum
함께 빛나는 국립광주박물관고인돌은 큰 덮개돌을 고임돌이 받치고 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입니다.
외형상 형태에 따라 북방식·남방식·개석식으로 분류됩니다. 북방식(北方式)은 우리나라 북쪽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어 북방식이라고 부르며, 땅위에 네모난 무덤방을 만들어 그 위에 납작하고 큰 덮개돌을 얹은 모습이 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탁자식(卓子式)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남방식(南方式)은 호남과 영남지역에 주로 많이 분포되어 있어 남방식이라고 부르며, 큰 덮개돌 밑에 고임돌이 고이고 있어 바둑판처럼 생겼다고 해서 기반식(碁盤式)이라고도 합니다.
남방식은 덮개돌 밑에 무덤방(石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분류 하기도 합니다.
개석식(蓋石式)은 우리나라 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면서 수량도 가장 많습니다.
고임돌 없이 큰 덮개돌만 지상에 있어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고 합니다.
개석식은 덮개돌 밑에 대부분 무덤방(石室)이 있는데, 납작한 돌을 세워 짜맞춘 모양(石棺形)이 있으며, 천석(川石)이나 할석(割石)을 쌓아서 만든 모양(石槨形)으로 구분됩니다.
우리 나라에서 확인된 전방후원형고분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현재까지 이 형태의 고분은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영산강유역 문화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이 형태의 고분이 확인된 것은 1984년 해남 방산리 장고봉고분이 처음이기 때문에 앞으로 정밀지표조사가 진행되면 그 수가 더 많아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전방후 원형고분의 소재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전방후원형고분은 평면이 한쪽은 네모[方]지고 다른 쪽은 둥근[圓] 형태를 갖추고 있는 무덤[古墳]을 일컫습니다.
전방(前方)과 후원(後圓)의 개념은 고분의 평탄한 방부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여겨 앞[前]으로 보아 전방(前方), 높고 둥글게 만들어진 원부는 매장주체 시설이 안치되었다고 보아 앞의 반대인 뒤[後]의 개념을 적용하여 후원(後圓)이라고 구분합니다.
본래 전방후원분이라는 명칭은 일본 학자가 천자(天子)의 궁차(宮車)를 모방하여 만든 고분으로 추정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장고형 고분 (長鼓形 古墳), 장고분(長鼓墳)으로 부르기도 하며 전방후원형 고분 (前方後圓形 古墳)으로 부르자는 견해도 있습니다.
초기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구릉의 선단부와 같은 곳에 조성되며 횡구식 석실(橫口式 石室)등이 채용됩니다.
4세기 중엽경이 되면 고분의 가장자리에 도랑[濠 또는 周溝]을 파는 경향을 보이며, 5세기경이 되면 평지에 조성되면서 거대화되는 특징을 보입니다.
한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적으로 5~6세기로 추정되는 예가 다소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영산강유역에 집중분포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주요 유적으로는 광주시 월계동 고분, 명화동 고분, 함평군의 신덕 고분, 해남 장고산 고분 등이 있습니다.
전방후원형고분은 일본 고분시대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는 고분형태로, 각 지역의 수장급이나 높은 신분의 묘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존재하는 전방후원형고분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이론(異論)의 여지를 남기고 있으며, 다각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방후원형고분의 기원문제와 한일(韓日)고대문화의 문화교류 및 정치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점뼈[卜骨]는 점을 친 동물의 뼈이고 동물뼈를 이용하여 점을 치는 과정과 행위는 뼈점[骨卜]이라고 합니다.
점뼈의 재료는 주로 동물의 어깨뼈나 거북의 등껍질·배껍질을 사용하였으며, 글자[文字]의 유무에 따라 무자복골(無字卜骨)과 유자복골(有字卜骨)로 나누고 있습니다.
무자복골은 중국(中國) 동북지역과 한국(韓國)·일본(日本)에서 출토된 것들이 해당되며, 유자복골은 중국의 황하(黃河) 유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복골에 쓰여진 글자를 갑골문자(甲骨文字)라고 합니다.
각종 동물뼈를 이용한 점복(占卜)풍습은 세계 각지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농경민과 목축민에 관계없이 널리 성행하였습니다.
한국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복골은 금속기로 약간 파내고 그 부분을 지져서 제작하였습니다.
해남 군곡리유적에서 출토된 복골은 1점인데 견갑골과 늑골면을 깎아 지져서 제작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출토된 복골은 거의 대부분 남한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철기시대에 해당됩니다.
진서 마한전(晉書 馬韓傳)에는 복골을 이용하여 길흉화복을 점쳤다고 하였으나, 한국에서 발견된 복골은 무자(無字)이기 때문에 점의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문헌에 나타난 점복을 보면,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국가의 대사에 소의 발굽을 이용하였으며, 백제 · 신라 · 가야에서는 거북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독무덤은 토기(土器)를 널[棺]로 사용한 것으로 보통 2개를 맞붙여 사용하나 1개 또는 3개를 사용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만들어졌는데, 특히 영산강(榮山江)유역에서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부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영산강유역에서 조사된 독널은 널로 쓰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커다란 독으로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독무덤은 대개 낮은 언덕 위나 경사면에 만들었으며 봉토는 원형(圓形), 방형(方形), 장타원형(長楕圓形), 장방형(長方形) 등으로 다양합니다.
이른 시기의 독무덤에는 봉토 안에 하나의 독널이 묻히는 것이 기본이지만 나무널과 독널이 함께 묻히다가 늦은 시기에는 여러 개의 독널만 묻히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삼국시대로 들어선 독무덤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대형고분(大形古墳)으로 발전하면서 매장용의 독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양상은 영산강유역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영산강유역의 독무덤은 대형의 전용독널을 사용하고 있으며, 고분의 외형은 원형분이 많고 방대형고분(方臺形古墳) 및 장타원형 고분도 발견됩니다.
독무덤에 부장되는 유물로는 귀걸이, 목걸이 등의 장신구와 손칼이나 도끼, 철정 등의 철기류, 작은 단지나 뚜껑접시 등의 토기류가 있습니다.
박물관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29번, 48번, 63번, 84번, 85번, 95번 이상입니다.
충분한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