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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국립광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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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ju National Museum

함께 빛나는 국립광주박물관
비쥬얼 이미지

발굴조사

이미지 없음
광주 신창동유적 발굴조사(6차)
  • 다른명칭
  • 소재지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632-4번지 일대
  • 조사기간2002-10-23 ~ 2002-12-12
  • 유적규모
  • 대상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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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이 곳은 1963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의 발굴 조사에 의해 기원전 1세기경의 매장유적인 옹관묘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번 조사는 사적 375호로 지정된 신창동유적에서 매장유적으로 알려진 옹관묘군 일대를 조사하여 묘제의 종합적인 성격 파악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조사결과 옹관묘 3기, 토광묘 2기, 고려시대 주거지 1동이 확인되었다. 유적의 서쪽부분에서 확인된 1호 옹관은 기원전 1세기대의 신창동식 합구식 옹관으로 노출당시 상부는 경작에 의해 결실된 상태였다. 적갈색 점토층을 굴착한 후 옹관을 안치하였으며, 옹관은 2개의 일상용 점토대토기를 사용한 것으로 장축방향은 북동-남서향을 취하고 있다. 대옹은 북동에 놓고 소옹을 남서쪽에 안치한 것으로 두 구연부는 삽입시키지 않고 맞붙인 형태이다. 2호 옹관묘는 드림이 있는 뚜껑을 사용한 옹관으로 유적의 북서쪽 가장자리 황갈색사질점토층에서 확인되었다. 2호 옹관은 기원 1세기대로 추정되며, 장축방향은 남동-북서향을 취하고 있다. 3호 옹관묘는 이번 조사지역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곳에서 확인되었다. 합구식으로 두께 2cm, 전체길이는 178cm이다. 옹관의 장축방향은 남동-북서향을 취하고 있다. 동체부에는 격자문, 頸部에는 삼각거치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옹관의 절반 이상이 파괴를 입어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다. 옹관의 결합상태는 두 구연부를 삽입시키지 않고 맞대어 놓은 형태이지만, 부장유물이 북서쪽 옹관에서만 출토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아 북서옹이 대옹에 해당된다. 옹관의 크기와 형태는 비슷하나 기벽의 색깔이 북서쪽 옹은 회청색이며, 남동쪽 옹은 황갈색 계통으로 차이가 있다. 부장유물은 대옹 바닥과 내부 충적층에서 마노제옥 5점과 유리구슬 2점이 출토되었다. 바닥에서 약간의 높이 차이를 보이며 평저단경호 2점이 놓여 있었다.

토광묘는 2기가 조사되었다. 2기 모두 장축을 남-북에 두고 있으나. 파괴가 심하여 구체적인 유구의 규모는 알 수 없다. 깊이는 대략 10cm정도만 유지하고 있다. 이중 1호 토광묘의 부장유물은 북쪽 단벽에 연하여 토기 2점이 겹쳐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수혈 주거지는 유적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경작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내부는 회갈색의 진흙이 적갈색점토의 지반층과 구별되어 윤곽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쪽 윤곽선은 훼손으로 인해 확인할 수 없어 전체적인 주거지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바닥은 평탄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내부에서 14세기대 고려청자와 도기편 그리고 청동젓가락 1점이 출토되었다. 신창동유적은 기원전 1세기경의 매장유적인 옹관묘군, 그리고 생산, 생활유적이 어우러진 복합 농경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소형의 옹관묘들은 전형적인 무문토기문화의 전통 속에서 영산강유역의 토착 농경민이 조사한 영아들을 위한 묘지로 선택한 곳으로 조영되기 시작하였다. 신창동 옹관묘는 일상토기를 이용한 합구식 옹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는 표고가 비교적 높은 위치에서 영산강유역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대형 옹관과 토광묘라는 새로운 자료가 확인되었다. 신창동유적의 형성시기는 초기철기시대에 조영된 신창동식 옹관묘를 근거로 하여 기원전 1세기부터로 알려져 있었으나, 합구식 대형옹관의 경우 기존의 영산강유역 대형 옹관묘에 대한 연구 성과와 비교해 볼 때 영암 선황리 출토 옹관과 유사하거나 약간 늦은 단계로 추정되며, 토광묘 또한 나주 마산리 등지의 토광묘와 유사한 단계로 보인다.